“근심 걱정 없는 사람 없고 , 문제없는 집 없고, 염려거리 없는 가정 없더라!”라고 말하면 “그래 그 말이 맞아!”라고 맞장구칩니다. 그만큼 우리 삶은 걱정 근심 염려로 가득 차있고, 염려를 마치 친구처럼 여기고 같이 살아가는 동반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결코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초대 교회 당시 기록된 기독교 문서들이 많이 발굴되면서 새로운 내용들을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을 참으로 애틋하게 따랐던 사람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문서 속에는 예수님을 좇았고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한 가지 특징적인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이름 앞에 거의 공통으로 쓰여 졌던 단어가 있는데 바로 '티테디오스'라는 것입니다. 바울 이름 앞에, 베드로 이름 앞에 붙여서 티테디오스 바울,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베드로 , 티테디오스 마가, 티테디오스 누가 등등이 나옵니다. 티테디오스는 말은 원래있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일종의 호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티테디오스라는 말은 '절대로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들의 삶이 변화된 뒤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삶의 많은 부분들이 염려와 근심 걱정으로 채워졌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염려와 근심을 뛰어넘어 감사와 기쁨으로 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이름을 많이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모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하나님이 된 것을 철저하게 깨닫고 주님께 자신들의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모두 맡겼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구애됨이 없이 평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세상이 줄 수도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진정한 평안이 주어지게 됩니다.
각박해지고 인심은 메마르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 불확실성이 커져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도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서로를 의심합니다. 자기를 지극히 사랑해서 그렇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라는 바이러스 때문에 신경들이 애민해졌습니다.
마스크를 한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바이러스에 걸려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저렇게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 아닌가?그렇다면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 곁에 가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자신은 마스크를 쓰고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있을 때는 “저렇게 위생 관념 없는 저런 사람들 때문에 바이러스에 걸려서 나에게 바이러스를 퍼뜨리려고 작정을 했구먼!”라고 의심합니다.
결국 서로 못 믿고 의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염려와 근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접해도 "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어" 하면서 염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염려거리를 의식적으로 잊어버린다고 평강으로 전환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먼저 염려와 근심거리들 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심 걱정 염려를 주님께 맡겨버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나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고 붙여 질만 합니까?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인 사람은 결코 염려하지 않습니다. 티테디오스 성도님, 티테디오스 집사님, 티테디오스 장로님으로 붙여진 다면
신앙생활과 인생은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