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기만 해도 귀엽고 예쁘고 신기합니다.
꼬마들이 놀고 있는 모습만 봐도 괜히 풍성하고 넘치는 기분이 들어찹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미래의 기둥이요 희망이라고 합니다. 아이들끼리 노는 모습을 보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특이한 것은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 성인들의 인생 축소판 같습니다. 자기들끼리 잘 놀다가 삐지고, 외톨이가 되고, 합종연횡을 하고, 편을 가르고 그러다가 다시 하나가 되어 뛰놀고 다시 다투고 화가 나서 울고, 해코지를 하고, 이간질을 하는 것들이 어른들의 행위나 별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런 아이들의 행태를 보면서 천사 같은 아이들이 왜 저렇게 지낼까하고 생각해봤습니다. 그 안에 어떤 아이들의 욕심이 발단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욕심이 아이들 마음속에 들어가면 천사 같은 아이들을 철저한 이익집단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 어른들도 누군가가 욕심에 이끌리는 순간부터 그 사람 주변은 갈등과 편 가르기와 이간질이 시작됩니다.
사실 욕심은 가시나 다름없습니다. 손톱에 가시가 박히면 뽑아야 합니다. 놓아두면 박힌 부위가 고통스럽게 하고 썩게 만듭니다. 또한 삶의 현장에서 뭐 하나할 때마다 아프게 만듭니다.
장미에 가시가 없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더욱 사랑받고 더 가까이 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상상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가시가 있어 장미답게 해준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불 땐 그 가시가 장미꽃을 찔러 찢어 향기가 더 진하게 풍겨나게 합니다.
그렇다고 장미꽃이 자기 자신의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가시 때문에 메마르거나 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진하게 될 뿐입니다. 장미꽃은 장미 가시와 싸워 이겨내고 더욱 선명한 장미의 모습과 향기를 풀어 흩날립니다. 사람들은 이미 어릴 적부터 자기 자신 안에 들어와 서식한 욕심이라는 가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좌우됩니다. 불행스런 인생은 욕심이라는 가시에 우겨 쌈을 당해 욕심에 굴복한 삶의 태도가 가져다 준 것입니다. 인류의 전쟁들도, 주변사람들과의 다툼과 갈등도 욕심이라는 가시가 찌를 때 젓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로운 길로 가고자 할 때 가시가 찌르면 바로 움찔거리며 아프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 하바국에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욕심의 가시가 욕심의 방향으로 가게하려고 찔러도 정해진 의로운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천국은 어린 아이 같은 자라야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사 같은 아이들은 예쁜 아이들이 아니라 욕심이 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어른이 욕심이 없으면 어린 아이처럼 예쁘지 않겠습니까? 욕심 없는 척을 잘하는데 너무 익숙한 우리의 위선들은 우리 주변 사람들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지만, 주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속일 수 없습니다. 주님 보시기에 어린 아이 같은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람이 욕심이라는 가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시와 싸워 이기는 사람만이 장미꽃처럼 사람다운 향기와 멋을 지닐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생을 마감하는 그 시간까지 가시는 계속 존재합니다. 이 가시를 인정한다면 계속해서 이 욕심이라는 것과 싸워야 할 우리 삶의 자세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하는 의무는 계속됩니다. 욕심과 싸워 이기는 사람만이 만족과 평안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와 맛이 저절로 장미꽃처럼 흘러납니다.
진한 향기가 되어 주변을 살리는 좋은 결과(변화)를 낼 수 있도록 성령으로 거듭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