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한창입니다. 주말에는 벚꽃행렬 차량으로 고속도로가 심한 몸살을 겪었다고 했습니다. 평소보다 4배가 넘는 차량들이 통행을 했기 때문에 정체가 심한 것은 당연하겠지요. 벚꽃이 한창 필 때 보면 대부분의 대지 색깔들은 여전히 갈색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완전히 하얀색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더 덧보입니다. 아직 대지 위에 피어난 꽃들은 보기 힘들 때입니다. 꽃이 없는 중에 자연에서 나오는 첫 꽃으로 여겨지다 보니 더 신선함을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실 벚꽃은 일본 꽃이 아닙니다. 원래 본산지가 우리나라입니다. 본래 제주도에 있는 왕 벚꽃이 원조입니다. 제주 왕 벚꽃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일본 말로는 벚꽃을 ‘사꾸라’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나쁜 의미를 더 얹어서 부릅니다. 심지어는 벚꽃이 일본 꽃인 줄 알고 잘라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벚꽃은 일본 꽃이 아닙니다. 일본 국가의 꽃은 ‘국화’입니다. 벚꽃은 일본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꽃일 뿐입니다. 추운 계절을 이기고 봄의 전령처럼 메마른 가지 끝에 움틔우고 꽃망울 터트린 벚꽃의 만개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함께 느껴보는 계절입니다. 차를 같이 타고가다 ‘저기 벚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말하자 몇 사람이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 시간을 더 달린 다음 점심식탁에 둘러 앉아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을 다시 돌려봤습니다. 그 중에 한분은 사진을 보고 감탄합니다. “이렇게 예쁠 수가 있어!, 이게 어디 있었지?”라며 묻습니다. “무슨 심각한 일이 있으세요? 모두들 벚꽃보고 아름답다고 사진을 찍고 그랬는데 모른 것을 보면 뭔가 근심거리가 있으니까 안보이고 안 들렸겠지요.”라며 식사 후에 조용히 물어봤습니다. “사실 우리교회 수석장로님이 간암으로 한 달 만에 아까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 진짜 중요한 훌륭한 일꾼인데 너무 속상해서 뭔가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귀나 눈은 내 마음 속에 무엇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보여 지기도 하고 들려지기도 합니다. 썩을 것으로 내 마음을 채우면 보는 눈도 귀도 어떻게 해석을 해낼지는 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지면 우리 삶에 눈으로 귀로 감동할 수 있는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채워진 사람들은 내가 갖고 있는 환경을 떠나 사는 것을 황홀하다고 표현합니다.
사람에게 제일 위험한 것은 마음속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속이 채워지지 않으면 허수아비나 다름없습니다. 그저 기계적으로 일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은 기계들의 집합체에 불과할 뿐이며 기계가 하나가 고장 나면 다른 기계로 대체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거기에 인성이나 감성은 중요한 것도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능력 있는 로버트 들만 있는 사회는 일을 척척 완벽하게 해내는 공장일 뿐이지 절대로 감성이 피어나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아닙니다. 사람마음을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허수아비가 사람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사는 것은 허수아비로 살면서 감성과 인성이 풍부한 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감성과 인성이 더불어 살아나서 서로 치유가 되고 힘을 얻고 위로가 되는 마음들의 모임이 진정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만 보인다면 허수아비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마음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마음의 귀에 들려지는 소리가 있을 때 참다운 사람들의 관계가 살아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