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배려 큰 감동
제가 어릴 적에 다니던 시골교회에서 가족찬양대회가 1년에 한 번씩 가을철에 열리곤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시절이었고 같은 또래 7명이 나름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어느 주일 밤 예배 때에 가족찬양대회가 진행되었습니다. 가족들마다 곱게 차려입고 출전을 했습니다. 어린 꼬마들도 단정하게 입었지만 시골아이들의 촌티 나는 모습은 여전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특별히 무슨 악기는 없습니다. 요즘처럼 드럼이 있거나 신디나 피아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다 규모가 있는 교회는 유원지 물가에 떠있는 오리 배에 달린 패달을 밟듯이 발로 열심히 교대로 눌러서 바람을 불어넣고 건반을 눌러서 소리를 내는 풍금이라는 것이 유일한 악기 였습니다. 대부분 성도들은 찬송가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찬송가를 부를 때는 괘도라는 넓은 종이에 큰 글씨로 써서 넘겨가면서 부르는 괘도걸이가 있었습니다. 물론 선택적으로 20여곡쯤 걸어둘 수 있습니다. 곡은 없고 가사만 있는 무곡찬송가가 주종을 이뤘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성도들은 은혜 받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갖춰져야 예배에 은혜가 꼭 넘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은혜 받는 것은 눈에 보이는 조건이 좋아서가 아니라 조건이 좋아서 받는 것입니다. 한 가정씩 강단 앞에 나와 괘도 걸이에 걸려있는 음표 없는 무곡찬송을 부릅니다.
늦은 곳이 빠르기도 하고 빨라야 할 곳은 느리게 부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음
표 없는 그저 들어서만 알고 있던 것이라 어떤 것이 정확한지는 잘 모릅니다.
드디어 함께 교회 다니는 교회 친구 정식이네 가정 차례가 되었습니다. 정식이네 아버지는 교회 다니신지 3년쯤 되었습니다.
온가족이 모두 열심으로 찬송을 부릅니다. 낮게 불러야할 곳을 정식이 아버지는 갑자기 힘차게 큰 소리로 올려 불렀습니다. 그것도 가사는 다음절의 내용으로 소리 높여 불렀습니다. 성도들은 재미있다고 박장대소합니다. 정식이도 그런 아빠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얼마나 창피했는지 당근처럼 얼굴이 빨갛게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들어왔습니다.
정식이네 다음은 구 장로님 네 차례였습니다. 구장로님 가정은 가족찬양대회에 나오면 거의 우승을 차지합니다. 작년에도 우승했던 가정입니다. 이번에도 우승은 굳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구장로님 가정이 인사를 마치고 시작하자마자 장로님은 가사와 음이 틀리고 꼬였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모습에 배꼽을 쥐고 웃습니다. 장로님 자녀들은 "아니 그게 틀릴 부분이냐?"라는 표정으로 장로님을 쳐다보았습니다. 구장로님네 가정은 처음으로 아무상도 받지 못한 채 가족찬양대회는 끝났습니다. 구 장로님 네 가정은 집에 가서 가족들로 부터 "어떻게 그렇게 부를 수 있느냐?"며2차 추궁을 당했습니다. 묵묵히 참고 있던 장로님이 드디어 입을 열어 "얘들아, 틀려서 미안하다. 그런데 틀리게 불렀던 것이 우승보다 나는 더 기쁘고 행복했단다. 정식이네 아빠가 찬송을 부르다가 틀릴 때 성도들이 웃는 모습을 보고 너무 당황해하고 어찌할 줄 모르더라. 혹시 마음에 심란한 생각을 가질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틀리게 불렀다. 그랬더니 성도님들이 나보고 정신없이 웃었을 때 오히려 정식이 아빠 얼굴이 밝아지더라.'지난해 우승한 장로님도 저렇게 틀리게 부르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위안을 삼은 것 같더라. 우리 가족은 우승보다 더 값진 것을 해낸 것이다"라며 구장로님이 말했다고 그분의 둘째 아들이 전해주었습니다. 작은 배려가 큰 힘과 감동을 주고도 남습니다.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현대사회는 감동할 것들은 많지만 감동할 줄 모릅니다.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은 밖에 불어오는 바람에도 감동합니다. 그러나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만 가지 은혜가 주어져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감동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호흡이 우리 마음에 있으면 감동이 넘치게 됩니다. 감동없는 세대에 감동을 주는 사람 바나바처럼 살아가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작은 배려는 큰 감동을 만들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