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70,80년도에는 고등학생들은 학생군사훈련이 있었습니다. 일명 '교련'이라는 시간표가 있었습니다. 한주에 2시간 이상은 이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학생들보다는 이수해야 하는 학과목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학생회장이라기보다는 연대장이라고 불려지고, 교복에다 체육복 그리고 교련복이라는 약간은 베지색에 검정 얼룩무늬 옷을 갖춰야 했습니다. 여학생들은 주로 여군들이 하는 간호를 교육받고 옆에 구급낭을 갖춥니다. 각 학교에서 훈련했던 것들을 지방단위로 묶어서 교련대회를 공설 운동장 같은 곳에서 개최합니다. 거의 군인들이 하는 열병식 분열식을 각 학교별로 시범을 보입니다. 개최지까지 오는 과정 속에 시내를 통과하기 때문에 볼거리 제공차원에서 가장행렬을 갖곤 합니다. 저는 탈을 쓰는 분야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탈을 쓰는 쪽을 대부분의 학생들은 좋아했습니다. 우선 부담이 적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뙤약볕에 해학이 넘치는 하회탈을 쓰게 되었습니다. 50명 넘게 각종 탈을 쓰니까 상대방 몸매나 걸음걸이를 보이지 않고는 서로다 알아볼 수 없습니다. 몇 가지 춤사위도 선생님께 배웠는데 성취속도 무척 빠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동작을 하는데 모두들 거리낌 없이 적극적이고 도전적이었습니다. 1주일정도 탈을 쓴 사람들의 춤사위를 배우고 탈을 쓰고 교문을 나서 시내로 향하자마자 동작들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탈을 썼으니 누가 누구인지도 몰라보니 창피할 것도 없으니 아주 대담해졌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가다가 다들 시들시들 해집니다. 탈을 쓰고 있으니 땀은 비 오듯 떨어지고 얼굴은 답답하니까 힘이 들어 지친 것입니다.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 이르자 선생님이 벗으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벗어버렸습니다. “야, 이제 살 것 같다!”라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가면 쓸 때 보다 벗을 때 더 좋아했습니다. 가면을 벗고 나니 얼굴이 너무 시원했습니다. 대신 가면을 쓰면 편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질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담대합니다. 행동에 대해선 무책임합니다. 책임을 가면에 전가 시켜버립니다. 여차하면 가면만 책임 앞에 벗어놓고 가면 뒤로 빠져나가버립니다. 그리고 무생물인 가면에게 손가락질과 원인을 묻습니다. 세월호는 잘못이 없습니다. 세월호를 운영한 사람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책임져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세월호라는 가면만 사람들 앞에 벗어두고 뒤로 빠져 나가버렸습니다. 가면을 벗어야 삶이 시원합니다. 언제까지 삶의 진솔함 없이 체면에 얽매인 채 가면을 더 깊이 눌러쓰고 있어야 합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쓴 가면만 가꾸고 뽐내고 싶어 안달입니다. 그런 현대인들의 삶은 의미가 아니라 연기일 뿐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가면 뒤에 살아가다보면 모두가 심각한 삶의 병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면을 권하는 세상, 가면을 쓰고 산다는 것이 삶이 아니라 연기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먼저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가면 뒤에 숨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면을 벗으면 자신의 삶이 시원하게 정리되면서 풍성해지기 시작합니다. 학력이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소유가 삶의 가면이 되면 진솔한 인생을 살기보다 껍데기 삶에 빠집니다. 예수님은 삶의 가면이 전혀 없었음을 십자가 위에서도 보여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