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품는 것만 보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 있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일부로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안보입니다. 잘 알고 지낸 분 중에 나이 지긋하신 분이 있는데 꼬마들을 무척 싫어합니다. 심지어 시끄럽다고 아이들이 있는 근처에도 얼씬 그리지 않는 성미를 지니신 분입니다. 며칠 전 이분과 한나절을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나가는 꼬마 아이들을 불러 세워놓고 말을 거는 것입니다.
“너 몇 살이니? 뭐가 제일 좋아? 참 예쁜 옷을 입었구나! 그렇지?”라며 꼬마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꼬마 아이들은 귀찮다는 듯이 시큰둥하며 가버립니다. 조금 지나다 또 다른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역시 이분은 그들에게 다가가 아까처럼 반복되는 질문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반응이 신통치 않습니다. 그래도 이분은 귀엽고 앙증맞다며 흐뭇한 표정입니다.
평소와 너무 다른 이분의 모습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어 “요즘 성격이 좀 달라 보이십니다. 무슨 심리적인 변화가 있었습니까? 아이들이 있으면 곁에 가까이 가는 것도 싫어하신 분이 꼬마들에게 다가가 말도 걸으시고 쓰다듬어 주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도 요즘 아이들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도 않으시고 예뻐하시는 것이 마치 인생을 정리하신 분 같습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십니까?”라고 여쭤봤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아이들이 싫었는데 요즘은 아이들에게 자꾸 마음이 끌려요 그저 아이들이 귀엽고 예뻐서 말을 걸어보고 싶어지고 꼬마들이 떠드는 소리도 짜증스럽게 들리지도 않고 오히려 아이들 뛰노는 소리들이 정겹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같이 놀아주고 싶어져요, 그냥 아이들이 좋아요.”라며 본인도 이해가 안 간다며 의아해 합니다. 다시 한 번 “참, 아들 결혼 한지 2년쯤 되었지요?”라며 질문을 했습니다. 돌아온 말은 “아, 예, 8개월 되었습니다. 요즘은 옛날과 달리 초음파 검사를 보여주는데 남자아이 랍니다. 너무 귀여워요 너무 기대됩니다.”라며 웃음을 짓습니다.
사실 이분은 손자가 생긴 이후로부터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자신에게 아이가 생겨지니까 다른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 안에 있으면 내 눈 밖에 있는 것도 내 눈 안으로 들어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내 외적인 삶에도 예수님이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삶으로 채워집니다. 세상에서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는 것도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어야 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만 내 눈을 통해 밖에 있는 것이 들어옵니다. 우리 마음에 썩어질 것을 품으면 내 눈을 통해서도 밖에 썩어질 것들이 보입니다. 내 눈밖에 더러운 것은 안 보려고 통제해도 헛된 수고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내 안에 품고 있는 것을 바꿔야 합니다. 내 안에 품고 있는 것이 바로 내가 눈을 통해 보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강조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있으면 내 눈을 통해 보여 지는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들이 보입니다. 어떤 대상을 똑바로 보는 방법은 그 대상을 내 마음에 품을 때만 가능합니다. 내 마음에 품지 않는 것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이중인격자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삶의 든든한 기초는 내 마음에 신실함을 품는 것입니다. 품고 있는 것만 보이기 때문에 성실을 품으면 성실하게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과 삶이 보이기 때문에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품지 못해서 봐야 할 것을 못 보고 살아갑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므로 영적인 시력도 좋아졌으면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