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라’와 ‘사랑을 받아라.’
사랑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귀는 연인들끼리도 서로 사랑받기를 원하고, 친구들이 결혼할 때도 꼭 사랑받고 살라고 기원합니다.
자녀들에게도 사랑받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는 사람들끼리 얘기할 때도 사랑받고 사는지 아닌지가 대화의 핵심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문제가 있게 될 때에 원인분석도 사랑받지 못한데서 생겼다고 진단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의 문제든 인격적인 문제든 그 원인은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이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신 사랑에 대한 정의는 ‘사랑하라’라는 명령어가 전부입니다. 물론 사랑에 대한 성격들은 자세하게 분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등등 표시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진정한 가치는 사랑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적도 사랑할 때에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아주 소극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서로 사랑하라’라는 입장입니다. 가장 최소단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로 살아가지 말고 사랑하는 자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단계 중 출발점을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는 엄청난 차이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인끼리 뿐만 아니라 부부사이에서 부모자식까지 대부분의 갈등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는 사람에게서 문제의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랑받는 사람 쪽에서는 언제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사랑이라는 그릇에 사랑이 부족합니다. 불평불만도, 사랑타령도, 짜증도, 원망도 사랑받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이미 사랑의 구걸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을 가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이곳이,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해줄 것 같은지 아닌지를 먼저 따져봅니다. 이렇게 저렇게 사랑받을 것을 계산하다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사랑이 있다느니 없다드니 불평불만이 나오다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것 같으면 옮겨갑니다. 이렇게 인생을 정서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사랑은 받기만 하면 채워지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받다가 받는 사랑이 끊기면 사랑에 허기져서 밥을 먹지 못하고 굶은 사람보다 오히려 더 좌절하고 분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한 것만큼의 공간이 생기게 되어 있는데 그만큼은 꼭 채워져야 할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내가 사랑해준 사람에게서 돌려받아 메꾸려고 한다면 반드시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해야 될 대상은 다양하지만 사랑한 사람으로서 소유하게 될 빈공간은 사랑의 상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됩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고 사랑합니다. 상대방에게 기대를 갖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으로부터 사랑하고 빈 절대공허자리를 채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으로 채워진 자는 사랑을 하면서도 늘 넉넉함이 있습니다.
본래 사랑의 출발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요한1서 4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면 사랑한 자의 빈 공간을 손수 채워주십니다. 사랑한 사람은 사랑받는 자보다 더 넉넉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아직도 관심은 사랑받는 것이라면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는 구걸자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요구는 사람들의 요구와 달리 “사랑하라”입니다. 그래야 사랑 많으신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는 기쁨을 위해 기도하고 도전하겠습니다
늘 내 안에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