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생명력이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입춘이 지나서 날씨가 많이 좋습니다. 그런데도 요 며칠은 최고기온과 최저 기온 차가 무척 심합니다. 이처럼 일교차가 심하면 몸이 적응하기가 힘들어 감기가 잘 걸립니다.
낮 기온이 높아질 때면 앞마당에 야채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막상 날씨를 살펴보면 약간은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2년 전에는 직접 야채 씨를 뿌렸습니다. 어린 시절을 농촌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파종을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기에 원칙에 벗어남이 없이 정성껏 파종을 마쳤습니다. 마당에 나올 때마다 언제 싹이 나올지 살펴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2주가 지나고 3주가 지나도 싹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더 기다려보자 하며 한 달 반을 기다렸는데 씨앗 한 개도 싹을 내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씨앗을 뿌려놓고 얼마 후에 영하의 날씨가 계속된 끝에 얼어 죽었거나 씨앗자체가 생명이 없는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행여나 싶어 올해는 방법을 바꾸어서 좋은 흙을 가져다가 사과박스 안에 있는 사과받침대에다 씨를 뿌렸습니다. 지난 주 뿌려서 거실로 가져와 비닐을 덮어주었습니다. 온도나 습도가 적당해서 그런지 4일 만에 싹이 올라왔는데 뿌린 씨앗만큼 모두 올라왔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제가 야채를 돌보고 있으면 야채를 자식들이라고 부릅니다. 모종을 사오면 자식들 사왔느냐고 말합니다. 아무튼 정성을 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성을 들이고 씨를 뿌려도 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번에 뿌린 씨앗들은 생명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것을 몇 만평을 심은들 무슨 결과가 있겠습니까? 겉은 분명 씨앗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없으면 그 자체가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를 심어놓고 많은 열매를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실망이 크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값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되었습니다. 당시의 권세가들은 이제 죽였으니 다 끝났다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분은 삼일 만에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생명은 가둬둘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작아도 생명의 씨앗은 바위틈에서도 싹을 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심령 속에 모신 사람은 그 사람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생명 되신 그분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요 머리로 삼고 살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분을 생각으로만 모시고 있거나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 비슷한 존재를 붙잡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쓰면서 예수님을 흉내 내는 생명력 없는 존재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자신의 인생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삶이 생명력으로 가득차기를 원하십니다. 생명력 없는 것을 붙잡고 그저 열심히만 살면 모든 것이 될 줄 알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장래가 얼마나 허탄하게 될지 안타깝습니다. 그들에게 생명 되신 주님을 전하고, 은총과 은혜 받아 살아갈 수 있도록 부활의 소식과 부활의 신앙을 전해주어야 할 사명이 생명 되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사명입니다.

윤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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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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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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