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지극히 작은 자라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아무 은혜도 모르는 우리 인간들에 의해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고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과 압제와 가난과 질병 속에 힘없이 살아가는 지극히 약한 자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성탄절하면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선물을 전해주는 존재는 어렸을 때부터 산타할아버지라고 여겼기 때문에 산타를 더 기다립니다.
물질인 돈을 선물로 받고 싶어 하는 것은 돈이 제일 큰 기쁨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위해서라면 어려움도, 힘든 것도, 밤늦게 까지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기쁨은 이런 하찮은 기쁨이 아닙니다. 기쁨을 표현하는 단어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기쁨(Happiness)이고 하나는 속에서 나오는 즐거운 기쁨(Joy)입니다.
Happiness는 해프닝(Happening)하고 연관이 된 것입니다. 좋은 일이 생겨서 복권이 되고, 집을 사고, 자동차를 사고 합격이 되고, 승진이 되고, 선물을 받을 주어진 기쁨 거리들입니다. 반면에 Joy는 이런 것들이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심령 속에서 넘쳐나는 본질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본질적인 기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약자든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한 자는 다 누릴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을 주시는 주님은 누구하나도 소외됨이 없이 은혜주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나라 남단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마을에 50명 정도 출석하는 교회가 있는데 나이로는 6학년인데 실제로는 2학년에 다니는 총명하지 못한 주일학교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교인들에게 말하자 교인들이 다 나서서 아이가 갈만한 곳을 찾아 나섰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 근처 저수지에 죽은 채 떠올랐습니다. 약간 부족한 아이라 살얼음이 생겼을 때에 얼음 타다가 빠진 것이었습니다. 성경말씀에 ‘지극히 작은 자’라도 소흘히 여기지 말라고 했는데 불순종하여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를 회개하며 수요일 밤 예배 때 온 성도들이 울었습니다. 동네 사람도 가족들과 더불어 울었고 그 안타까운 눈물은 소문이 되어
마을에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경쟁사회 부산물로 나타난 따돌림 현상은 학생들의 정신세계를 덮고 있습니다. 잘난 아이와 못난 아이로 구별하며 아이들이 왕따를 당합니다. 지극히 약한 자를 치료하실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즐거운 성탄절이 되십시오.

이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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