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로그인
목사님 칼럼

길과 안내자

페이지 정보
profile image
작성자
  • 2건
  • 1,258회
  • 작성일:
본문

길과 안내자
사람마다 원하는 길이 있습니다.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쉽게 풀 수 있는 길은 없을까하고 방법을 찾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길을 몰라서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거듭한 끝에 생을 얼마 남겨 두지 않는 상태에서 겨우 깨닫고 방황을 끝낸 경우들이 많습니다. 사소한 삶의 문제부터 우리가 공부하는 것까지도 길이 있습니다. 특별히 인생에 있어서 길은 너무 중요합니다. 삶은 육신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길을 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육신적인 사망에 이르기까지 만의 길을 구하고 찾을 뿐입니다. 그런데 육신적인 죽음이후에도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이후의 길은 살아있을 때의 길보다 더 중요합니다. 죽음이후의 길은 죽은 다음에 고친다고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후회한다고, 통곡한다고, 권세가 있다고 길을 바꿔갈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어떤 길을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죽음이후의 길은 세상의 현명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 길을 이끌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이후의 길을 이끄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가는 길이 바쁜데 뭘 그것까지 생각하느냐?”라고 별 생각하거나 고려해봐야 할 것도 아닌 것처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어떤 분들은 마치 인생의 명언이나 되는 듯이 “지금 사는 것도 모른데 뭐 미래까지 알려고 하느냐?, 사는 것도 걱정거리가 많은데 죽음도 걱정해야 되느냐?”라는 말들을 입에 올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무척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너무 무책임하다는 것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가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알고 가는 길이 있는가하면 전혀 모르고 흉내만 내면서 가는 길도 참 많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많은 길을 제시 받지만 먼 훗날에 전혀 쓸모없이 삶을 낭비하게 한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길은 단순한 논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길은 호흡이며 실제적인 것입니다. 철학일 듯싶지만 생명력입니다. 그래서 길은 어떤 구간에만 한정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삶에서 시작되었으면 죽을 때까지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까지도 계속 생명력을 지닌 체 생명의 통로로 연결이 되어야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길은 한때 추구하는 유행 같은 문화도 아닙니다. 길이라면 지금 삶의 호흡이 되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존스 선교사가 정글에서 아무리 헤매고 다녀도 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진맥진한 채 포기하고 있는데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말도 안 통하지만 아주 기본적인 표현으로 길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원주민은 "나를 따라 오시오."라고 말하고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막 달려갔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따라가던 선교사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하여 원주민을 붙잡고 "도대체 어디로 갑니까?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원주민이 "길은 없습니다. 내가 바로 길입니다. 믿기나하고 따라오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얼마 후에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했습니다. 길이 있습니까? 우리 인생에 있어서 “길”자체는 예수 그리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은 죽은 안내자가 아닌 살아있는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안내자 없이 혼자 달려오셨습니까? 스스로 생각할 때 열심히 사는 것 같고 보람 있게 사는 것 같습니다. 실상은 알고 보면 헤매고 낭비한 열심히요, 시간일 뿐입니다. 길과 안내자는 하나인 것입니다.
댓글목록
profile_image
작성일 김은정님의 댓글
  길되신 주님께 더욱 귀기울이고 따르겟습니다.
profile_image
작성일 문희경님의 댓글
  길되신 주님이 계심에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