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부담과 기쁨의 차이
오늘은 다시 장맛비가 시작되었습니다. 남부지역에서 시작하여 중부지방에 비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비가 오는 중에 새롭게 등록한 가족이 있어서 몇몇 성도들과 함께 심방을 했습니다. 예배하고 나서 맛있는 식사를 나눴습니다.
이어서 다과를 들면서 그 성도를 전도했던 집사님 딸이 이 성도님 댁의 딸의 친구여서 한번 방문했는데 “그 집에 친구 따라 갔는데 너무 과자가 참 많아서 친구는 좋겠더라.”라고 부러워하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이들 입장에서 보면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같은 것만 많아도 부럽고 행복해 보입니다. 조금 더 크면 신형 전자기기를 소유한 것이 행복의 단위 일 것입니다. 더 성장하면 번쩍거리는 빛을 내는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달리는 것을 소망처럼 여길 것입니다. 부모들은 위험하다고 오토바이 타지 말라고 사주기는커녕 잔소리만 하니까 아예 피자나 중국음식점 배달용 오토바이라도 타보려고 알바를 하는 어린 학생들도 많습니다. 청년이 되면 개성 있는 자동차를 운전하고 싶어 합니다. 전세 살 형편도 아닌데 그나마 전세보증금 빼서 월세로 가고 외제차라도 무리해서 구입합니다.
그때를 지나면 투자가치 있는 아파트를 욕심 부려 주택 대출받아 삽니다. 이자부담, 관리비 부담, 체면유지비 부담 등등 삶의 부담이 턱밑까지 차오릅니다. 그래도 이 생활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친구들도, 주변 아는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살아갑니다. 주변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어느덧 삶의 진리처럼 받아들여 삽니다.
정확한 삶의 깊은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닌 주변 사람들을 흉내 내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이 속절없이 삶의 압박에 못견뎌내고 소식 없이 조용히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흉내 내고 살아갑니다. 괴테가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의미 없는 소유나 지식을 제일주의로 삼고 사는 자는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옛 봉건주의 시대에 머슴 같은 농노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이 배웠다면서, 더 많은 것을 보았다면서. 더 대단한 것을 가져봤다면서 왜 그렇게 살아갑니까? 자기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가장 학대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자들은 자기를 알게 됩니다. 자기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존귀함이 있습니다. 나 자신을 알게 되고 찾게 되니까 남의인격도 그 만큼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 알면 후회는 그만큼 커집니다. 돈을 그 만큼 벌기 전에, 그만큼 배우기전에, 명예를 그만큼 얻기 전에 당신의 삶을 이끌어주는 삶의 주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소유도, 배운 지식도, 인기나 명예도 실제로 당신 것이 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국가 대표 축구선수들은 다들 축구를 잘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잘 찬다고, 잘 안다고 경기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장이 잘 이끌어야 합니다. 주장은 운동장 안에서 감독의 의도대로 조율하는 조율사요 지휘하는 지휘자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능력의 주장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감독자 되신 주님을 주장으로 삼는 사람은 삶을 누리면서 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삶을 부담스럽게 살아가게 됩니다. 부담과 기쁨의 차이는 내 삶의 주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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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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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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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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