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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칼럼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라는 말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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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라는 말의 위기

모든 것은 모두 그 자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성을 잃어버리면 조롱거리가 되거나 버려집니다. 김장철에 소금이 맛을 잃어버렸다면 하얀 돌멩이에 불과합니다.
곧바로 길가에 버려지고 사람들에게 짓밟혀집니다.

어떤 그림을 보니까 호랑이가 쟁기를 끌고 일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것은 호랑이로서 가져야할 본성인 야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호랑이로서 더 이상 존재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 믿음의 소유자란 의미입니다.
예수 믿는 자의 야성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의 성품을 지니면 됩니다.
뭔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부러워하고, 닮아가려고 하거나 흉내 내려고 한다면 이미 예수 성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야성을 잃어버린 사람을 세상은 더 이상 기대하거나 존경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인식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야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군인이 군인다워지는 것은 춤을 잘 추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얼굴이 미남이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강인함과 담대함과 애국심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직장수준으로 존재한다면 일반 공무원이나 별반 차이가 없겠지요.

요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은 큰 고양이가 쥐에게 엉덩이를 물리는 사건입니다.
고양이 세 마리가 담벼락 곁에서 오후를 즐기고 있는데 제법 큰 쥐 한 마리가 다가갑니다. 물론 세 마리 고양이들은 쥐가 다가오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 두 마리는 약간의 거리를 줍니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앉아있던 고양이는 쥐에게 엉덩이를 물리고서야 야옹 하면서
몇 걸음 피합니다.
그곳을 휘 젖고 난 다음 쥐는 자기 갈 길로 갑니다. 이제 쥐들은 고양이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고양이 앞에 쥐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미 고양이들이 가졌던 특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굴욕적인 고양이가 되었습니까?
고양이는 게을러졌습니다. 주인이 주는 넉넉한 사료와 여기저기 널려있는 투명한 쓰레기봉투에 담겨있는 음식물들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달려가서 쥐를 사냥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고양이를 통해서 생겨난 많은 속담들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특별히 이솝우화에 나와 있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라는 얘기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본래 지닌 야성을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없이는 예수 믿는 다고 자처한 사람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살아 있는 원초적인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처절한 자기 깨뜨림과 내려놓음과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 없이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는 계속 귓전을 울릴 것입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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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노하나님의 댓글
  불쑥불쑥 세상을 부러워하는 마음, 말들이 아직도 저에겐 많이 있습니다.속사람이 변화되어 예수님만 붙잡고 진짜 예수님 믿는 사람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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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오은경님의 댓글
  세상에 조롱거리가 아닌 세상도 인정하는 예수쟁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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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이선용님의 댓글
  살아있는 원초적인 성령의 사람 ..그런 삶이 되길 몸부림 치겠습니다..신앙의 야성을 되찾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