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절망은 고장 난 신호등이 아닙니다.
절망은 고장 난 신호등이 아닙니다.
절망은 다음을 바라 보라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절망이 오면 더 이상 다음신호를 보지 않습니다. 절망은 희망과 차이가 없습니다. 희망은 절망가운데서도 있고 희망가운데서 있지만 절망은 오직 내 마음에서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면서 스프링처럼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희망의 사람들은 절망의 동네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지혜가 있지만, 절망의 사람들은 절망의 동네에서 더 깊은 절망을 보는 습관과 생각이 있습니다.
단순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어야겠구나 하는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사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볼 수 있는 통찰력과 자세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연결시켜 나가는 지혜를 말합니다.
사막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무덤에 대한 것이 하나 생각나는데
걷기가 뜨거울 정도로 달궈진 모래 사막 위를 계속 걷던 아버지와 아들이 거의 지쳐가는 중에 있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은 많이 남아 있는데 아들은 "아빠, 더 걸으면 죽을 것 같아요, 물도 떨어지고 목이 마르다 못해 아파옵니다."라고 말하자 아빠는 부추기고 격려합니다. "그래도 사람은 한번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간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 가다 보면 멀지 않아 사람들이 사는 마을도 지나가게 될 거야 "라며 도전정신을 넣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빠와 아들은 가는 길을 계속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리고 깊은 절망 속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걸어가고 있던 아들이 갑자기 나타난 무덤들을 보고서 무척 놀라 "아빠, 말했잖아요, 결국은 이렇게 될 거라고요, 여기에 묻힌 이 사람들처럼 죽는다고요." 라며 흐느끼며 풀썩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아들에게는 어떤 의지도, 희망도,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아빠는 아들 옆에 앉아서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 말대로 우리가 지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희망이 목마른 것은 아니지 않느냐 단순히 목이 목말라하는 거지 우리 마음이 갈증 난 것은 아니지 않느냐, 여기 무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덤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길이 있는 거야, 여기에서 멀지 않는 곳에 마을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무덤들이 있다는 것은 이 근처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증거란다." 아들은 힘을 내어 아빠와 함께 가다가 곧 마을을 만나게 되고 쉼과 먹을 것을 얻고 계속해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무덤 앞에서 절망하고 주저 앉아 있으면 무덤 속에 누워있는 죽은 사람과 똑같지만 말씀에 눈을 떠서 지혜를 얻게 되면 희망이 앞길의 장애물들을 열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할 것입니다. 지금 주저 앉고 싶습니까? 자신의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무지 길이 없어”라 고 한탄하십니까? 절망과 실패와 자격지심의 무덤들 사이에서 오히려 희망의 빛 줄기를 잡고 일어나십시오.
바로 그 자리입니다. 일어나야 할 그 자리가 승패의 자리입니다. 일어나기만 하면 해결되는 자리입니다.
무덤은 당신에게 "그대로 앉아 있어라."라고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주님은 "네가 일어나라"고 주신'표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무덤을 향해서 말씀하실 때에 죽은 '나사로'는 나왔습니다. 지긋지긋하게도 나는 안 된다고 여긴 무덤 같은 자리에 머무르지 마시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당신을 향해 응원하시는 주님께 진솔하게 나가십시오. 그러면 삶의 진정한 쉼도, 기쁨도, 힘도 얻게 됩니다. 절망은 고장 난 신호등이 아닙니다. 마치 빨강신호등이 고장 난 신호등이 아닌 것처럼. 다음을 향한 변화의 과정일 뿐입니다.

이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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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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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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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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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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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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