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행복은 거기에 있습니다.
행복은 거기에 있습니다.
행복은 실체적인 생활이어야 합니다.
“행복감이 있다.” 라고 말하면 그것은 하나의 감정을 표현할 뿐입니다. 언제 거꾸로 뒤집힐지 모릅니다.
즉 행복감은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처럼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감정을 가지고 있고,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다스리고 훈련시키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훈련시켜놓았어도 순식간에 다 뒤집어 엎어놓을 수 있는 것이 생각, 감정, 느낌들입니다.
이미 이 주제들은 본능적으로 육체에 소속되어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수십 년을 아니 거의 평생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을 생각하나 다스려보고자 산속에 들어가 수행하신 분들도 많습니다.
철저하게 삶을 명상한 사람은 생각에 대해서 정의와 정리를 한 경우도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자신이 정리한 생각과 따로 움직이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점유하고 있는 곳을 모르기 때문에 생각을 묶어놓거나 정리해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은 머리에 있고 감정은 심장에 있고 느낌은 신경에 있다는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더욱 복잡해지고 해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도 하트모양을 한 가슴에 있습니까? 그곳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감정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고 더욱 느낌도 아닙니다.
마음은 전인격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도 이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이고 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구원을 받습니다.
신앙생활에 실패한 경우들을 보면 생각이나 감정, 느낌으로 믿는 줄로 아는데 있습니다.
좋은 생각은 합리적인 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생각을 잘 하고 사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감정, 느낌, 생각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본질적으로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은 육체적인 본능으로써 감정이나 센스를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생물체도 마음은 존재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전인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그 사람의 단순한 행위만을 말하지도 않고 중심과 삶의 일체화를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 관리한다는 것은 이중적일 수도 없고, 감정에 지배당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의 열린 공간과 기쁨의 창은 내 자신이 낼 수 있습니다.
그저 지하 골방에 앉아서도 넓고 넓은 하늘을 나르거나 높은 창공에 올라 확 트인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40층 아파트에서도 서러움과 억울함과 분노로 눈에 눈물이 가득 차고 근심어린 눈동자로 태양을 직접 눈을 뜨고 봐도 눈부시지 않는 마음은 높은 40층 아파트에 창문으로 둘러쳐진 곳에서 밖을 봐도 답답합니다.
세상 무엇보다 마음을 개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마음이 좋은 삶의 좋은 밭이 되도록 밭갈이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밭이 되어 좋은 씨앗을 뿌리면 좋은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밭갈이를 하는 것을 가리켜서 문화라고 합니다.
좋은 문화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의 밭갈이를 열심히 할 때에 이뤄집니다.
교만이나 아집의 돌들을 마음 밭에서 끄집어내어버리고, 미음과 이중적인 가시나무를 뽑아내고 , 이기적인 뿌리들을 뽑아내고, 단단한 마음을 말씀의 쟁기로 뒤집어놓으면 멋지고 새로운 문화가 생겨집니다. 여기에 행복의 씨앗을 심어야 행복의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은 모두가 원하지만 바로 거기 마음의 밭갈이에 있습니다.

이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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