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사랑의 깜박이
이번 주간은 종려주일이며 고난주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나큰지 더 깊이 알아가고 체험하는 주간이입니다.
사랑인지를 모르고 사랑을 받는 사람은 때론 사랑에 대해 부담스러워하고 피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멀리 떠나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실체와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하면서 본능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다 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생의 지침은 빨리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생이 힘든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핑계됩니다. 사실은 사랑의 갈증이 심해짐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딴청을 부릴 뿐입니다.
어린 자녀에게 부모가 맛있는 것을 아주 친절한 자세로 주면 그 자녀는 받아먹는 것도 엄마를 위해서 받아먹어주는 것처럼 생각한 아이들이 있습니다. 부모는 사랑을 전해주지만 사랑의 혜택을 받는 아이는 자신이 먹어주는 것은 부모를 무척 불쌍하게 여겨준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돌아가시고 부모로부터 더 이상 사랑을 전달 받을 수 없을 때쯤에 조금 깨닫는 어리석은 삶의 전철을 밟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수없이 전달되어져도 그 따위 사랑이 내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는 것은 나 자신의 삶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삶의 정체성은 나이가 많다고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 굳어져버리면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져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놀라운 체험의 역사는 닫힌 심령의 문을 여는데서 시작됩니다.
어떤 외딴 시골에서 사슴도 키우고, 닭, 오리, 개, 돼지 등등을 키우며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부인은 신앙이 점점 잘 자라고 있었지만 남편은 이것저것 구실만 찾다가, 고난주간이 다가오자 함께 교회 나가자고 했더니 이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서 별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가질 않았습니다. 아내는 예배드리러 가고 남편은 점심때가 되어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고 살피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알을 낳고 품는 닭들도 있어서 먹이를 뿌려줍니다. 그런데 알을 품고 있던 암 닭 두 마리가 모이를 던져주어도 꿈쩍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암 닭이 머리에 구멍이 뚫린 상태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주 나타난 족제비가 와서 알을 품고 있으면 알을 보호하기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족제비가 닭의 머리에 구멍을 내고 피를 다 빨아먹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내 던지고 얼마든지 자신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암탉처럼 품으시는 그 사랑을 포기하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더 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위에서 남김없이 묵묵히 멸시와 조롱과 쓰라린 고통을 참으시고 물과 피를 그 몸에서 다 흘려주셨던 것입니다.
이 농부는 이 사실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의 십자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단을 했습니다. 그는 저녁 예배에 나가서 회개하며 주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주님은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견디시고 우리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받을 사랑만 늘 생각하고 줄 사랑은 잊어버리고 사는 깜박이 시대는 흩어져서 삐악거리는 병아리들만 넘칠 뿐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부터 이 세대는 치료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사랑의 깜박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이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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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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