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그림자
수요일 낯인가 봅니다. 집 앞에 나와 골목길로 들어서는데 5살쯤 보이는 어떤 여자 아이가 앞에 간 젊은 엄마를 20m쯤 떨어진 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연신 자기 뒤를 따라 오는 그림자를 바라보고 밟아보기도 하고 잡아보려고 하면서 많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습니다.
엄마는 빨리 오라고 성화입니다. 엄마가 안 되니까 손짓을 하면서 빨리 오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손 사례를 치면서 이 그림자가 왜 이런지 알 수없다는 식의 손동작을 엄마를 향해 보냅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림자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좇아버리려고 하는 몸짓도 해봅니다. 그런데 밟아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그림자는 왜 있는 것일까? 그것은 과학적인 이유를 갖다댈 것이 많지만 우리 삶을 비유해서 말해본다면 "우리들의 죄와 같은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죄를 곤충에 비교하면서 "죄는 딱정벌레와 같다"라는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한번 붙으면 계속 떨어지지 않고 따라 붙어 오는 것이 딱정벌레와 같은 속성을 지녔다는 얘깁니다.
그림자도 계속해서 따라 옵니다. 산을 올라가도 따라오고 뒤로 가도 따라오고 들로 가도 옥상에 올라가도 따라옵니다. 그림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그 아이는 조금 지나 5층짜리 빌라 앞을 지나면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빌라가 길가 쪽으로 햇빛을 차단하고 큼직한 그림자를 드리웠기 때문에 그곳을 지날 때는 자신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햇빛이 있는 곳을 가면 반드시 그림자를 만납니다.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나가면 우리의 죄라는 그림자를 인정하고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주님을 더 가까이 우리 머리위에 즉 중심에 두면 둘수록 그림자는 작아지고 내가 죄인이라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지면 그림자는 더 멀리 드리워집니다. 그러면서 죄는 나와 상관없는데 나를 성가시게 따라다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정오의 낯빛에 서있으면 그림자는 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죄의 원인제공자가 나 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 영혼은 주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어둠의 그림자 가운데로 들어가면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길은 없어진 채 더 깊은 어둠의 그늘에 함께 묻힐 뿐입니다. 더 큰 그림자속에 들어가면 모든 그림자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림자는 오직 자신을 전시해 줄 뿐입니다.
우리가 그림자를 통해서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로 삼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영적인 발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두울수록 우리들이 죄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날씨가 구름 끼고 흐려지면 아무 그림자도 안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정오의 해처럼 우리의 정중앙에 있을 때 그림자가 제일 작은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정중에 모시면 우리의 죄는 가장 적어집니다. 뿐만아니라 자유는 제일 많아집니다.
이런 그림자가 같은 죄악의 그림자를 없앨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만이 이런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쉬워서 내 부모, 형제, 자매 와 주변을 어둠가운데서 빛 가운데로 인도하려고 홈커밍데이(Home coming Day)를 10월25일 날 갖기로 하고 온 성도들이 이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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