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변화는 아름다움의 선구자
날마다 초록으로 바뀌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회 뒷산인 삼각산의 색깔은 갈수록 진녹색으로 바뀌고 은행나무가로수들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푸르름의 자태를 드러내기에 바쁩니다. 삭막한 겨울 날 나무 가지를 기다리고 지켜보게 된 것은 변화의 옷을 확신하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지난날들도 주변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했던 파란 잎들이 다 떨어져버리자 사람들도 다 우리를 떠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들의 변화를 희망삼고 묵묵히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래서 변화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좋은 의미로의 변화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도전해야 될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똑같이 같은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꼭 개성이라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사람마다 가치관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솔하게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경험에 비추어서 동일한 것은 쉽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철학에 견주어서 아니다 싶으면 말씀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내적, 외적으로 삶이 변화 받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경건한 생활을 훈련하는데 있어서 때론 귀찮고 힘들고 피곤하게 여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성도가 되려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든지 자신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정도는 다 있게 마련입니다. 잘 넘기는 사람들은 피곤함과 힘듬을 너머 변화될 자신을 보기 때문에 거기에 개의치 않고 넘어갑니다.
성도라면 쉴 틈 없이 자신을 예수님 앞에 노출시켜서 거룩한 생활에 대한 도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차츰차츰 변화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콩나물이 햇빛에 노출되면 파란색으로 변화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자기 노출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옛 모습으로 쉽게 전이되고 말 것입니다.
아주 옛날에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게알리스바디아스라는 가까운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게알리스바디아스는 소크라테스를 만나면 별로 좋아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게알리스바디아스는 말끝마다 "나는 네가 싫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이 친구를 만나기만 하면 게알리스바디아스의 부족한 부분을 예리하게 끄집어내서 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자주 만났습니다.사실 서로 만날 때마다 게알리스바디아스는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이 친구의 부족한 모습이 소크라테스라는 사람 앞에 드러나서 마음이 조금은 불편하고 창피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소크라테스에 버금가는 훌륭한 인격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아집과 편견 그리고 자기 철학에 철저히 쌓여있는 사람은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변화는 자라남을 말합니다.
자기 중심주의 라는 비닐코팅 속에서는 어떤 살아있는 존재도 변화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중심주의에 도취되어 있다면 스스로 변화의 생명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늘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노출시키는 도전을 계속 해야 만이 세상도, 주님도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변화는 예수님 앞에 자신을 얼마나 노출시켜 더불어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선용
작성일
이선용님의 댓글

정인숙
작성일
정인숙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