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실 몸매 가꾸고 예쁘게 하는 것들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습니다. 당장 몸이 고단하고 아프면 몸매에 신경쓰는 것조차 피곤합니다. 피부가 어떻고 몸매가 어쩌고 하는 것도 다 건강할 때 이야기입니다. 지금 식사를 해도 소화도 되지 않고 몸은 천근 만근 무거운데, 쌀 뜬물 받아놓고 그것으로 세수하고, 오이 짤라서 팩하고, 얼굴 푸석하다고 마사지 하고 그러겠습니까? 이 모두다 조건에 따라서 바뀌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병들어도 늙어도 실패해도 잘되어도 성공해도 하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포기해야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 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채우고 싶은 것'입니다.
1억원이 목표인 사람이 7천만원에서 "아, 이제 됐다."하듯 , " 이 맛있는 것 먹었으니 이제 다시는 먹지 않아도 된다.", "드디어 과장이 되었으니 승진 안되도 나는 정말로 만족한다."라고 의지의 실천을 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에이, 1억원 벌었는데 내친 김에 10억원까지는 만들어야지."하면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채우고 싶어합니다.
오늘도 특별한 신바람이 나거나, 경직되어 삶을 살고 있는 이유가 '바닥에 가려져 있는 욕심의 항아리'를 채우려다 "곧 찰 것 같다"라는 것에 중독되어서그렇게 살고는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가지는 '쉬고 싶은 것'입니다. 대부분은 "쉬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쉬면 생물학적인 입장에서나 의학적인 입장에서 심리학적인 측면이나 경제적인 측면 모두에서 심각한 문제를 발생합니다.
우리 문화에서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쉬는 것'입니다.
'쉰다'라는 의미는 주로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 잠자듯이 있는 것'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쉰다'라는 것은 '몸은 똑같이 움직이되 다른 종류의 것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늘 직장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은 집에서 잠이나 자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페인트 칠을 한다든지
등산을 한다든지 불우이웃을 돕는 일 등등을 하는 것입니다.
은퇴했으면 땅을 판다든지 장사를 한다든지 어려운 사람 집짓기 등을 하는 것이 쉰다는 의미입니다.
즉 육체의 리듬을 계속해서, 활동을 통해서 유지시켜 주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심지어 몸이 아파서 수술하고 나서도 바로 움직일 것을 의사들은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모든 수술부위가 빨리 아물고 치료가 빠르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쉼은 몸이 쉰다고 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쉬어야 합니다.
내적으로 묶이면 겉은 포승줄이 없지만 수천만개의 줄로 결박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와 양심의 무게에서 누가 자유케 할 수 있습니까?
단순한 인생철학이나 삶의 경험이 답일 것같습니까? 그것은 그럴싸하게 느껴집니다만 실제는 자유케 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사업도, 수학이나 영어같은 공부도, 상대방을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볼 때는 말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세상의 크나큰 전쟁은 모두다 말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전에는 지금처럼 병원영안실이나 장례예식장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고 집에서 많이 했습니다. 그럴 때에 돌아가시는 분의 집에 여러차례 방문하게 됩니다. 물론 임종 때도 봅니다. 그러면 " 나는 한이 많아~, 나 말할 것이 많아" 하십니다. 그러나 다 말 못하시고 돌아가십니다.
일생동안 그렇게도 말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내 할 말 다하려다가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실패를 맛보고, 갈등을 겪고, 싸움과 미움을 만들어 낸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침묵하지 못합니다.
"침묵은 금이랍니다."라는 말은 한 낱 장식품일 뿐입니다.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욕심중에 욕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보다 먼저 나를 이해 해달라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내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을 접고, 잘 들어준다는 것은 쉽지는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말을 배우는 것은 2년 정도면 되는데 하고 싶은 말 참고 침묵하는 것은 50-60년을 걸려야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고 싶고, 채우고싶고, 쉬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 한몸이 되어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서로 유익한 공생관계가 아니라 유익한 삶에 방해를 주는 해충입니다. 이 해충에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고 싶어 안달나하는 이 세가지에 대한 절제의 능력을 갖춤으로 누리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정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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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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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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