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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칼럼

이중적인 삶의 치료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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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인 삶의 치료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것입니다.

빛의 행위는 빛을 비추는 일입니다. 빛을 스스로 발산하는 것입니다.
빛을 내려면 자체가 발광체가 아니면 안됩니다. 오직 우리 주님은 빛의 근원입니다. 그러기에 빛이 저절로 발산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자체로 빛도 지으십니다. 천지에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는 빛의 모양은 흉내 낼 수 있지만 빛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빛을 품으면 되는 것입니다.
전구에서 빛을 내라고 천장에 수없이 달아놓습니다.
그런데 전구 자체에서 빛을 내는 것은 못봤습니다. 전구나 형광등은 하나의 불을 키는 도구일 뿐입니다.
할로겐을 넣었느냐 질소를 넣었느냐 네온을 넣었느냐의 차이 일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이 있는 전구를 살 수도 없습니다. 그저 여러 형태를 지닌 전구입니다.
전구는 전구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면, 예쁜 모양새가 더욱 예뻐지려면 전원을 품어야 합니다.
전기와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전기와 연결이 되어지지 않으면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우리 믿는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빛된 존재가 되려면 우리가 잘나고 똑똑하고 성격이 좋아서, 재주가 좋아서, 권세가 있어서, 오랜세월 교회를 다녀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심령에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결되지 않는 것은 빛의 모양을 띨지는 몰라도 참된 빛을 낼 수는 없습니다.
주님과 연결되지 않으면 빛된 생활을 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 하는 모습을 흉내는 냅니다.그런데 앞뒤가 다르거나 안과 밖이 다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한다고 하면서 뒤에서는 조금도 양심의 가책없이 비난받을 일을 합니다. 김포시의 한 장애자 시설은 무척 시설을 잘 갖춰놓았습니다.그래서 사람들은 시설이나 활동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그 자리에서 결정할 정도의 매력을 갖도록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거기에는 정원이 넘치는데도 입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시설 원장과 부원장이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횡령과 폭행이 죄목이었습니다.
급기야 그곳은 문을 닫게 되었고 몇년 후 주인이 바뀌어 새로운 종류의 시설로 개원했습니다.
그들은 보호자들이 입소를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 시설만 둘러보거나 프로그램만 확인하고 그럴듯하면 입소를 결정한다는 심리를 이용했으며, 표현력이 현격히 떨어진 사람위주로 입소시켜 외부로 비리들이 발설되지 않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호자들이 방문할 수 있는 날짜를 정해놓고서 그날은 식단표대로 식사를 제공하고, 옷도 깨끗하게 입혀주고, 목욕도 시켜주었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주어야 할 것들은 주지 않고 모두 빼돌려 개인적으로 착복하고 조금 성한 사람 시켜서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조건 폭행하도록 하는 파렴치한 짓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내온 우편물은 천사들이나 할 듯한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왜 그렇지요? 예수님과 연결 없는 것은 양심이 쉽게 무너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에서는 누구든지 빛을 흉내내는 이중적인 삶을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양심을 찾고 빛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빛되신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분을 우리 심령속에 모시면 우리의 양심은 밝아집니다. 어둠은 사라집니다.
불안한 어둠의 세계가 없어지니 저절로 갈등이 사라지고 평강이 찾아옵니다.이중적인 삶의 치료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것입니다.
이 땅위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하하는 성탄의 계절입니다. 그분으로 더불어
진정한 빛이 한 사람, 한 사람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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