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집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한 사람도 있고, 띄엄띄엄 있는 한가한 전원주택에서 이웃집의 간섭 없이 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채소도 심어 먹을 수 있는 뜰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 한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 건강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맑은 공기가 있는 시골집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토피 같은 피부 질환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을 생각해서 황토 집에서 살고 싶어 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아마 각자 사연과 조건에 따라서 희망하는 집이 다른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기러기 아빠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 자식들을 캐나다에 아내와 함께 보내놓고 집에서 혼자서 밥해먹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은 아무것도 힘든 것이 없답니다. 그는 조그마한 중소기업체 사장이신데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별스럽게 어려움이 없는데 자녀들이 어른거리거나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무엇으로 메꿀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막내아들의 조그마한 일에도 까르르 넘어가는 호탕한 모습은 오히려 밤마다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도 먹어보고 밤늦게 친구들을 만나보지만 별반 효과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는 수없이 공휴일에도 회사에 가서 일하고 평일에도 늦게 까지 일하는 것으로 시간적 입체적 빈 공간을 채워 넣지만 여전히 등 뒤에서 밀려오는 가족들의 대형스크린은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분은 그 어떤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빨리 돌아와 함께 사는 집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이해가 갔습니다. 저도 몇 년간 아내는 이곳 한국에 있고 저는 유학차 미국에 있는데 도무지 혼자 있는 것이 힘들어 한 달 만에 아이들을 미국으로 불러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외로움을 타는 편이라 아이들과 함께 있어서 괜찮았지만 아내는 교회 돌보랴 살림하랴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둘째아이가 학교에 다녀와서 누워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여서 엄마 없이 지낸다는 것이 여러모로 힘들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엄마가 해주어야할 부분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도 많았습니다. "왜 울고 있어, 어디 아파,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라고 물어도 고개만 흔들고 있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저녁 식사 무렵이 되어서 물어봤습니다. 딸아이는 " 우리 엄마랑 다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엄마 참 많이 보고 싶어요."라고 대답하고는 이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터라 뭐라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한 동안 눈가에 이슬을 머금은 채 침묵이 자리 잡고 말았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살기 좋은 집은 서로 화목하며, 사랑하며 오손 도손 마음이 합쳐진 집이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정주일로 지킵니다. 집이야 얼마든지 돈만 따라주면 모든 형태의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은 돈으로도 명예로도 지을 수 없고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비싼 집이라고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잠언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주는 것은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지은 그림 같은 집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집이 더욱더 복되며, 고기를 반찬으로 삼을 정도로 잘 먹으면서 다투는 것보다 가난해서 채소밖에 먹지 못할지라도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사는 집이 모두가 진정으로 살고 싶어 하는 집이 됩니다.

김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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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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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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