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순간의 이김은 육신에서 나오지만 영원한 이김은 본질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잘 사는데는 자기 자신을 더욱더 성숙시키고 수준을 높이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건강함과 성장함이 너무 쉽게 무너질 때가 많습니다. "이젠 괜찮겠지, 안전하겠지" 했는데 비참한 환경에 처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주저앉게 되는 것은 큰 이유때문은 아닙니다. 조그많다고 여기기 쉬운 상대방들의 궤변들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들을 유혹하고 성인들을 덫에 빠지게 한 것들은 "이 정도쯤은 괜찮을거야 "라는 자기 검증시스템과 자기성찰부실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들수가 있습니다.
이정도는 이해할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많은 청소년들이 무너질 가치관도 없이 성장하다가 황폐할 때로 황페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참상을 우리들은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현혹시키는 이중인격적 궤변을 통해서 얼마든지 삶의 자리를 흔들 때가 많습니다.
이런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본질을 알아야 되고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영적, 육적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지,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지, 삶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바로서기 위해서도 주님의 뜻을 올바르게 아는데 노력을 해야합니다. 며칠동안 굶주려 먹잇감을 찾아나선 늑대 한 마리가 물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예쁜 새끼 양을 보았습니다. 그냥 잡아먹자니 왠지 양심이 찔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양심을 조금은 무디게 하기 위하여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내고 싶었습니다. 늑대가 꽤를 내서 하는 말 "야, 양이 먹던 더러워진 물을 내가 어떻게 먹겠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새끼 양은 그렇지 않다고 당차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이요, 냇가의 아랫쪽에 있고 늑대 양반은 한 참 위쪽에 있는데 어떻게 내가 마시던 물이 더럽겠습니까? 오히려 당신이 있는 윗쪽이 훨씬 깨끗하지요" 이 말에 늑대는 원칙적으로 맞는 새끼 양의 말에 할 말은 하지 않고 원칙에 벗어난 구실의 말을 또 만들려고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다손치자, 그런데 이놈아, 세상 떠난 우리 아버지께 못된 짓을 했었어 너는 용서 받기 힘들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어, 2년전에 호랑이게 쫓겨갈 때에 너는 옆에서서 비웃었잖아"라고 본질과 다른 공격용 대꾸만 했습니다.
새끼 양은 늑대가 말도안되는 궤변만 하고 있다가 자기에게 유리해지면 해친다는 사실을 빠르게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어리석게 도망가지도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논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늑대 아저씨는 계산 할 줄도 모른가봐요, 2년 전에는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에 늑대는 자가 발전 분노에 "난 더 이상 너 같은 강퍅한 양은 용서할 수 없어, 너같은 놈 때문에 이 세상이 시끄럽고 복잡해" 라는 말과 함께 새끼 양을 찢어 먹어버렸습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에게만 맞추는 사랑, 신앙생활, 헌신, 의로움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다가와 선동하고 넘어지게 하는 이중인격적 궤변가들이 참 신앙과 진솔함을 조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악한 자들의 궤변은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늑대앞에 사라진 새끼 양은 늑대의 양심을 이미 이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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