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칼럼
당신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까?
당신은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까?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겉 생활은 같지만 삶의 내용에 있어서는 많이 다릅니다.
믿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져야 되고 세상 사람들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을 소유해야합니다.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몇 년 전에 성남에 가는 길에 모란시장이라는 곳을 들렀습니다. 그런데 경남진주에서 오신 아주머니 두 분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분들 대답은 “다른데서는 이런 것이 없고요 구할 수도 없어서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오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으려고 와야 대고 그것을 찾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단순한 밥 한 그릇이 아니잖습니까?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영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서 오는 그런 부산물을 얻으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강과 기쁨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생명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선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소금과 빛 자체가 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금을 한 자루 헛간에 놓아둔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전구들 켜서 박스 안에 넣어두면 어디에 씁니까? 소금은 꺼내어서 사용할 때에 놀라운 의미를 지니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빛과 소금은 내가 될 테니까 너희들은 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부모들은 공부하는 자녀들에게 “너는 학생이면 열심히 공부하라 돈은 내가 될 테니까 공부해야 될 시간에 무슨 아르바이트한다고 하지 마라 그 부분은 내가 담당 하겠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있으면 그것 가지고 맛을 내서 먹고 썩지 않도록 녹여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은 안하고 소금과 빛만 되겠다는 것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타십시오. 엘리베이터가 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다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기준이 다릅니다. 믿는 자들의 근본 자세는 세상 사람들이 보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는 기준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서 그들이 진리 가운데 살게 하는 것입니다.(엡 5:8)
빛이 있으면 어둠은 물러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좋은 일을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빛도 좋겠지만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세상 사람들이 윤리나 모범에 더 앞서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찾는 높은 윤리, 도덕의식만 키운데 목적을 둔다면 더 좋은 윤리의식을 갖는 사람들이나 단체가 있으면 다시 그곳이 목적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러나 세상의 윤리나 도덕은 시대의 문화에 따라 달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잣대로서 역할을 영구히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빛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어둠에 처한 곳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지 못하고 얻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한 빛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본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맛입니다. 소금은 짠맛을 지켜야 한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버리고 밟히고 천덕꾸러기가 됩니다.(마5:13)
믿는 자들은 맛이 있어야 합니다. 오래 참는 맛, 성령 충만한 맛, 은혜의 맛, 진리의 맛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맛을 내기 위해서는 녹아져서 본질의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세상에 녹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신이 작은 가루로라도 변화하여 썩어지는 곳을 끝까지 쫓아가 썩지 않도록 막아서는 것입니다.
소금은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서로 썩지 않도록 격리시키는 일을 합니다. 세상에 접하면 썩도록 되어 있는 것을 썩지 않도록 접하는 면을 서로 닿지 않도록 중간에 넣어주는 것이 소금입니다. 김장할 때에 소금이 배추세포 사이사이에 들어가서 서로 간에 닿지 않도록 막아서서 썩어져야할 배추 잎 파리들의 만남을 서로 떨어지게 만들어 썩지 않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정이, 장차 썩어질 수밖에 없는 것들 끼리, 원수와 원수 사이에, 불평과 불평사이에, 원망과 원망사이에, 시기와 질투사이에 들어가서 서로 붙지 않도록 많은 배려를, 기도를, 사랑을, 영적인 능력을 통해서 방부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의 근본은 주님을 영접할 때만 될 수 있습니다.(요14:6) 그리고 마지막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은 변화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변화를 거부한다면 예수 믿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 자동으로 삶의 변화가 옵니다. 희생이란 것은 본래적인 역할을 말합니다.
휘발류가 자동차 엔진 속에 들어가 타야 일이 되듯이 , 희생은 근본적으로 살리는 일을 합니다.
엔진이 수 천 만원 짜리가 되어도 휘발유가 들어가 타지 않으면 고철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인간 본래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 본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소금도 형태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 변화 없이는 소금이 본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일년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달라져야 합니다. 차돌맹이는 1년이 지난 후나 10년이 지난 후나 별 차이가 없이 똑같습니다. 소금과 차돌이 색깔은 똑같이 하얀 색이지만 소금은 녹아져서 짠 맛을 냅니다.
이처럼 내 자신이 변화를 갖게 되면 역할을 하게 되며 주변에 전과 다른 변화를 가져옵니다.
소금의 사회적인 책임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자기 가치 보전이요 가치 상승입니다.
소금이 가치 확인이 안 된다는 것은 본래적인 맛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말을 듣는 것도 구제를 많이 안해서 그런 줄을 알고 사회를 향해서 돈도 많이 내놓지만 여전히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없는 것은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돈이 아니라 전기불은 빛을 내야 하는 것인데 빛은 안내더라는 것이요 소금은 맛을 내야 하는데 맛은 내지 않고 색깔은 소금 같은데 짠맛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합시다. 빛 되신 주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 빛을 냅시다. 소금의 맛을 냅시다. 그러면 영광스런 삶이 우리 앞에 있게 될 줄을 믿습니다.(사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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